게으름에 대한 찬양
- 원시 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 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 주기보단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방법을 쓰게 되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따라서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20)
-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20)
-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돤 노동을 주장케할 뿐이다. (24)
-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 당신에게 고기를 제공해 주는 정육점이나 빵을 제공하는 빵집 주인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해 준 음식을 즐길 때의 당신은, 일하는 데 필요한 힘을 내기 위해 먹지 않는 한 불성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란 얘기다. (29)
- 4시간 노동으로 생활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나는 지금 소위 '지식인'으로 만드는 따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30)
-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33)
-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 기계의 생산력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 발전된 경제 조직이 여가를 파격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여가가 많아지면 상당한 지적 활동과 관심사들을 보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루해하기 십상이다. 여가를 가진 인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육받은 인구이며, 또한 그 교육은 직접적 유용성을 가진 과학·기술적 지식뿐 아니라 정신적 기쁨도 목표로 했음이 틀림없다. (45)
- 산업주의 경향은 애초부터 생산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소비와 일상 생활에는 별로 역점을 두지 않았다. 이것은 생산에 관계된 이윤을 강조한 결과다. 그리하여 공장에서는 과학화와 최대한의 노동 분업이 이루어지는 반면 가정은 여전히 비과학적인 채로 남겨져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과중한 노동이 어머니에게 떠맡겨졌다. 인간 활동 가운데 가장 무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이며 불만족스러운 영역은 금전상의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부문들이라는 시각이 대두된 것은 이윤 창출이란 동기가 지배적인 데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65)
- 이윤 동기로 얻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에 속하는 것으로 노동자 계급의 아내들과 아이들의 복지, 그리고–훨씬 더 공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주택가 미화 작업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주택가들의 추악함을 3월의 바람이나 11월의 안개 보듯 당연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다. 만일 개인 회사가 아닌 시당국에서 도로 계획을 하고 대학 교정 같은 주택가를 건설한다면 미관상 즐겁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근심 및 가난과 마찬가지로 추악함도 우리가 사적 이윤이란 동기의 노예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67)
- 옛날, 한 자그만 읍에 정육점 주인이 있었다. 그는 다른 정육점들이 자신의 고객을 뺏어가자 몹시 격분했다. 다른 정육점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 그는 읍내 사람들을 모두 채식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자신도 역시 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그는 깜짝 놀랐다. 이 정육점 주인의 어리석음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만 사실 강대국들의 어리석음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84)
- 바람직한 관심이란 아무 목적 없이 아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자질을 가진 교사라면 아이들의 자유에 간섭할 필요도 별로 없겠지만 혹시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해도 아이들에게 심리적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업무가 과중한 교사들로서는 아이들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간직하고 있기란 대단히 어렵다. (130)
- 문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문명의 제1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예견'을 꼽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고 어른을 아이와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다. (...) 나는 문명에 필수적인 또 하나의 요소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지식'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문명을 '지식과 예견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활 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10)
- 현대 과학의 진보로 인해 파생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한 단계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알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249)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1997/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송은경 역/사회평론 20160103 270쪽 8,800원
대대로 지배 세력은 노동의 존엄성을 강요하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본분이며 윤리라는 관념을 만들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능률 숭배에 사로잡힌 자본주의는 이익을 위한 행위만 바람직하다는 이데올로기로 변신했습니다. 러셀은 기술 문명의 발달로 사회를 현명하게 재조직한다면 하루 4시간씩만 일을 한다면 실업자 없이 게으름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기술로는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찬양하는 목적은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자(258)"는 것입니다. 노동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고 멍을 때려야 발전한다는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수학자이며 작가이자 반전활동가였던 철학자 러셀이 1935년에 발표한 글입니다. 백여 년이 지났지만 멍때릴 여유는커녕 더 각박한 세상이 됐습니다. 러셀이 지금 시대에 산다면 즐겁게 보낸 시간은 절대 낭비한 시간이 아니라며 멍을 때리고 있을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수학자이며 작가이자 반전활동가였던 철학자 러셀이 1935년에 발표한 글입니다. 백여 년이 지났지만 멍때릴 여유는커녕 더 각박한 세상이 됐습니다. 러셀이 지금 시대에 산다면 즐겁게 보낸 시간은 절대 낭비한 시간이 아니라며 멍을 때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