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애는 완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데,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나아진다'는 말은, 종종 '비장애인과 비슷해진다'는 욕망을 함축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서 '나아짐'이라 함은 '걷게 됨'이었다. 내가 받은 여러 치료의 목적이 '조금 더 예쁘게 걷기, 오래 서 있기'에 맞춰져 있던 것처럼. 그때 현미와 나에겐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한 발자국 더 걸으면, 조금 더 예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면 그것보다 기쁜 게 없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고, 내 몸을 좀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치료를 받는다. 걷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한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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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로 서 있는 것보다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 해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장애인 되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며 운동하고 싶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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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내게 마음의 고향이라면 현미에게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절망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자, 가장 혼란스럽고 괴롭게 느껴질 시기에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눈 공간이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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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다른 몸을 가진 딸을 사랑하는 일, 그 아이를 돌보며 보낸 수많은 시간을 표현하기에 '모성'이라는 단어 하나는 부족하다. 모성애라는 단어만으로 현미를 설명하는 건 억압과 욕망을 함께 담고 살아가면서 닮아있는 여성들과 기댈 줄 알았던 현미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것만 같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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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목적을 이야기하자면, 자신은 꽤나 비겁한 종교적 인간이라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종교의 힘을 믿었는데 그 순간이 그러했다고 한다. 태균은 나의 건강과 안위를 조금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바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적었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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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이라는 단어에 갇혀 원망할 대상을 찾아다녔던 순간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평화를.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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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장애인들은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갈등에 빠지는 것을,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절망하는 행위를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갈등과 절망을 경험하는 게 장애인의 삶에서 마치 일생일대의 분기점이라도 되는 것마냥 미디어에서 초점을 맞추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만약'이라는 말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빛을 본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극대화되는 환상 같은 단어다. 나는 장애에 대해 절망할 시간에 구겨진 책을 다시 소중히 펴고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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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훨씬 작은 동물 가족들이 보이는 배려를 발견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배려가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쮸, 꾸미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매일 살피는 것처럼. 나의 개와 고양이도 주의를 기울여 사랑하는 인간을 어떻게 하면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을 눈치채면 동물과 산다는 것은 일방향적으로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교감이라는 걸 알게 된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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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대중교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꾸 대중이라는 말 안에 장애인이 있는 것은 까먹는 모양이다(버스는 아예 모르는 게 확실하고).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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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5분 뒤의 상황도 예측하기 어려운 무계획 인간인 동시에 24시간 뒤의 이동 경로와 발걸음 수까지 계산하는 계획 강박 인간으로 살고 있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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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보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해라' 파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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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하기를 그만두기로 마음먹는다.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에 점잖게 해명하는 것은 때때로 가치 없는 의견을 값진 말인양 포장하는 일이 되곤 한다. 내게 그런 관용은 더는 없다. 가치 없는 질문과 항의는 가치 없는 말로 되받아치고 싶다. 그러니까, 이렇게 뽕!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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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선을 배워가는 것이다. 생애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과 감각을 알
아가고 서로에게 번져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가 확장된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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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의 몸에 맞추어진 수업 과정에 따라 시설물들을 이용하며, 비장애인들의 이야기만을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모습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소속감을 주는지 알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난 후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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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할 수 있는 건, 내가 만났던 사람 중 정말 착하고 친절하면서 장애인과 생활해본 적 없는 사람 보다 나와 1년 함께 생활한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친구가 나를 더 편하게 대해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육을 받아서도 아니고, 장애인이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해서도 아니고, 그저 함께 생활하는 것만으로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당황한 눈빛으로 모든 말씨를 조심해서 내뱉고 내가 지금 앉으려는 의자를 빼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손을 계속해서 움찔대던 사람이 능숙하게 휠체어를 미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 좋다.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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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회를 떠난 사람들은 자연스레 큰 사회에 진입한다. 한 번 분리된 이들은 이미 비장애인들이 점령해버린 사회에서 자꾸만 뒤늦게 '합류해야' 할 사람들이 된다. 합류하려고 자신의 몸을 바꾸고, 사는 방식을 바꾸기를 강요받는다. '합류해야 하는 사회가 될 때,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된다. 삶의 과정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존재하는 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면 좋겠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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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걷지 않는 아이를 마주했을 때, 이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섬세하지 못한 말과 오지랖 속에 장애아동의 존재는 사라지고, 단지 그것을 해명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상처만이 남을 뿐이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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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덜' 준비해온 것들 탓에 같은 문제에 부딪히는 개인이 각자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 언제까지 이렇게 애써야 할지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와 같거나 다른 삶을 살아오던 이들이 함께 틈새를 발견해내는 감각을 갖게 되는 순간을, 그래서 아주 미세하게나마 '덜' 들이 서서히 메꿔지는 때를, 그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기에 또 행동하기를 감행한다. 한번 알고 나면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당연하게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 이 감각을 더 많은 사람이 느꼈으면 한다. (247)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김지우/휴머니스트 20220627 248쪽 16,000원
"스스로 걷지 않는 아이를 마주했을 때, 이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노력하지만 여전히 제 시선과 생각이 많이 부족합니다. 더 배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