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박준/문학동네 20121205 144쪽 8,000원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1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2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3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4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5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6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7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8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9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10

봄날에는
'사랑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11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12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13


세상 끝 등대 2」라는 마지막 시는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한다. 시에 등장하는 미인으로 추측된다. 시인은 미인처럼 아름다워보고자 시를 썼지만, 결국 미인의 자서전이 되자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고 했을 것이다. 이 시집은 미인을 위해 대필한 자서전이다. 시인처럼 아름다워지고 싶다.


  1. 동지(冬至)
  2.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3. 꾀병
  4. 관음(觀音)
  5.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6.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7. 옷보다 못이 많았다
  8. 여름에 부르는 이름
  9. 마음 한철
  10. 낙서
  11. 저녁
  12. 기억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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