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수많은 투쟁과 희생을 치러냈고, 실로 위대한 민주주의를 이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제나름의 진단을 말씀드리자면,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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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정치의 광장에서는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자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만, 일상의 공간에서는 공개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깁니다. 이제 광장 민주주의는 일상 민주주의로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거지요.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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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교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익혀 잘 적응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독일 교육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 더 중시합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입니다.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청소년들이 굉장히 비판 의식이 강합니다.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마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배후를 의심해라.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성숙한 민주시민이 된다"라고 가르칩니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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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일이 백만 난민의 기적을 이룬 바탕에는 인간 존엄을 지키는 것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은 국민적 합의, 시민적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높은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을 길러낸 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이라고 확신합니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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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많은 장점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묶여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시아에서 어느 나라도 일본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현재'란 금방 이해하시겠지요.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해 동북아시아 전체가 물리적으로 소통이 안 되는 형국입니다. 중국의 '미래'가 뜻하는 것은 미래의 중국이 패권주의로 나아갈 것이라는 공포를 주변국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 한반도의 분단 '현실', 중국 패권주의의 '미래'가 동북아시아의 교류와 번영,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 이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풀어낸 나라가 딱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입니까? 바로 독일입니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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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기착취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자기착취가 가장 심한 나라입니다. 자기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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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감독관은 내 안에 있다'는 통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은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사상입니다. 그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은 68세대에게는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와 함께 성경처럼 여겨지던 '정전'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유인이 못 된다는 거지요.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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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지옥이 된 것은 야수 자본주의, 즉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독일 등 유럽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 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고요. 결국 정치 지형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정권 교체가 된다고 해도, 한국은 결코 지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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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을 한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권력을 분점해 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오늘날 정치 민주화와 경제성장,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 된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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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 시야를 넓혀 생각해 보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반도 통일이란 지난 20세기 내내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거대한 두 사회 시스템 중에서 최악의 두 국가가 결합하는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20세기에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했던 두 체제,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사실 국가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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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통일이란 지난 100년 동안 있었던 다양한 사회주의의 실험 중에서 가장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와 지난 세기의 수많은 자본주의 사례 중에서 가장 약탈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합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통일은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는 두 국가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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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과 관련하여 남북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북한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 남한의 약탈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인간화할 것인가. 이 두 개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바로 통일 사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공동의 인식입니다. (243)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김누리/해냄 20200306 260쪽 16,500원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정치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런 체제를 용인할 수 있지요?" 자유시장체제를 지지하는 자들이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 사회학자의 물음입니다.
광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외치는데 점점 우리나라는 자살률과 빈곤율이 최고인 이상한 헬조선이 됐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은데 당연하다고 강요합니다. 독일이 반드시 옳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배울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공동체가 파괴되며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담대하게 시작합시다.